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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특수 의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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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날짜0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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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장애인 선교정책 세미나

21세기의 교회와 해외선교정책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장애인 선교

 

▶ 일 시 : 1998년 4월 20일(월요일) 오전10시-오후6시

▶ 장 소 : 총신대학교 종합관 2층 일반 세미나실

▶ 주 최 : 세계밀알연합회·한국교회연구소

   한국의 특수 의료선교

Ⅰ. 한국 의료선교의 개관
1. 초기의 기독교 의료선교 (1884-1890)
1) 선교사에 의한 광혜원(제중원)설립 : 1885년 4월 10일
- 정부병원 제안서에 나타난 목표
(1) 한국인에 대한 선교가 목적
(2)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3) 한국인 의료진 교육을 표방
- 광혜원의 운영은 한국정부(외교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가 재정지원과 운영을 하고 선교부(미국북장로회)는 의술을 담당하며 의사의 급여 제공. 정부병원이자 왕립병원으로서 주로 왕실과 고관들을 치료하면서도, 일반 민중들도 치료
- 초기부터 의사양성사업을 진행(1886년 3월 29일, 16명의 학생 교육)
2) 미국 감리회 스크랜튼 의사, 민간병원(1885. 9. 10) :
민중계층을 위한 무료진료 시행
3) 부녀와 여성을 위한 치료사업
- 1887년 7월 여성치료 위해 엘러즈 여의사 파송, 왕실과 귀족 여성 치료
- 미 감리회는 여성전문병원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이화학당 구내에 개원, 18887년 10월 메타 하워드(Meta Howard)여의사가 한국도착
4) 공중보건의료활동 :
1886년 여름 콜레라 유행, 제중원 콜레라 환자 치료, 모든 외국인 총동원,각 집을 방문하고 약을 나누어 줌
5) 이 시기 :
헤론(Heron, 惠論)은 자신의 사역을 "위대하신 의사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강조함. 선교사역이 잘 이뤄지지는 않았으나, 서양인 의사들의 헌신적 사람에 대한 감동을 줌

2. 진료소의 전국적 확산과 병원전도의 개시(1890-1904)
1) 제중원 - 운영권이 한국정부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1894년), 한국정부는 병원부지를 계속 무상 임대함/ 한국정부-5년 후 병원을 독자적 설립(1899년), 의학교 등을 정부차원에서 설립. 1894년 보건관련 부서 위생국 신설.
- 기독교의료기관은 한국민중을 위한 진료사업
2) 각 선교부의 정착와 의료 선교지역 확대
- 선교부별 의료선교의 확대(1900년 이전에 대부분 개시) : 미국장로회(1884), 미국북감리회(1885),호주장로회(1889, 1902), 영국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회(1892, 1893), 미국남감리회(1896, 1898), 캐나다장로회(1898)(선교활동을 시작한 년도와 의료선교개시년도가 다른 경우는 앞의 괄호에 두개년도를 기재) 등 7개 선교부가 활동 중. 이 중 북장로회와 성공회가 가장 큰 규모로 의료사업을 진행(안식교는 1908년에 의료사업 개시)
3) 의학교육
- 제중원 1899년 정식의학교(1900. 9, 정부에 등록)-뒷날 세브란스 의학교로 발전
- 여성의료인 양성사업 : 1890년 셔우드 여의사 의료상습반 시작, 1901년 한국최초의 여의사 애스더 김 박이 미국유학후 한국귀국
- 간호사 양성 : 1903년 에드먼즈 간호사가 보구녀관에서 간호원양성학교 시작
4) 전도의 개시- 1890년 북감리회의 민간병원인 시병원에서 처음으로 병원예배가 시작되었고, 1894년 제중원의 경영을 북장로회가 인수하면서 제중원에서도 병원예배 시작. 1890년대에 병원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전파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5) 공중보건교육활동.전염병퇴치활동 및 여성과 맹인사업을 위한 선교사업
6) 특수의료사업의 시작-맹인사업
홀(Hall) 여사는 1903년, 평양에서 맹인보호소(House for the Blind)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한국 특수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그녀는 주재 전도사의 딸 오봉래(Pong Nai)에게 점자 읽기와 쓰기, 뜨개질 등을 가르친 후 교사로 삼았으며 소녀 원아들에게 수공업 노동을 하게 하여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또한 홀 부인은 뉴욕 점자법을 한국 점자법으로 만들어 도입하였다.
7) 선교사들의 헌신 : 전염병 퇴치, 질병에 걸려 사망 - 기독교에 대한 편견제거에 공헌함 - 전도의 문을 여는 데에 효과적이었음.

3. 선교병원의 현대화(1904-1910)
1) 현대식 병원건물 신축:미국 북장로교의 경우 부산 전킨기념병원(1904), 서울 세브란스병원(1904), 대구 메리롸이트기념병원(1904, 1906), 선천 미동병원(In His Name Hospital, 1905), 평양 래드기념병원(1906), 재령 재령병원(1908), 강계 계레지 병원(桂禮知, 케네디,1910),청주 덩컨병원(1912) 남장로교는 군산 앳킨슨기념병원(1906), 북감리회는 서울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1912), 남감리회는 개성 남성병원(아이비기념병원, 1908), 영국 성공회는 진천애인병원(1909), 호주 장로회는 진주 배돈(培敦, 페이튼 병원, 1913) 등을 완공 혹은 건축중이었다. 실로 1904년에서 1913년 10년 동안에 13개의 현대식 벽돌로 건물을 신축하고 현대화된 설비를 갖춘 병원을 개원하였다.
2) 의료의 전문화 - 연합의료기관 세브란스의 설립
- 1899년 설립추진 1904.9.3 제중원은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세브란스 병동 신축 이전
3) 의학교육의 체계화와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증대
- 1907년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 배출(체계화된 의학교육)
- 간호사 양성 : 보구녀관에서는 1906년, 세브란스 간호원양성학교는 1908년에 학생간호원에게 가관식을 거행하였고 세브란스는 제1회 졸업생을 1910년에 내게 되었다.
4) 전도사업의 체계화
- 병원전도가 한국인 전도인과 전도부인을 통해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
특히 입원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주병원의 경우처럼 입원환자의 90% 정도가 개종

4. 일제의 탄압속의 의료사업 확대(1910-1924)
1) 역사적 배경: 총독부의 탄압
- 세브란스 졸업생은 별도의 국가고시를 통과해야 의사면허 발급(1919년 이후 해제)
-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일제의 의사면허 시험을 통과하여야 한국내 의료활동을 하게 함(1923년 해제, 그러나 그후 다시 면허시험을 보게 함)
- 1909년 일제는 의병탄압을 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설립한 군인병원을 관립자혜의원으로 전환 전국 각도에 확대/ 서울에는 대한의원을 <총독부 병원>으로 개편 확대
2) 선교부의 의료정책 : 위기와 확장정책
1910년 현재 관립병원 14개, 일반개인병원 126개 등 일반병원 140개, 선교병원 29개로서 병원수에서는 선교병원이 전체의 20%에도 못미쳤다. 또한 이후에 관립병원과 일반사립병원의 증가율은 기독병원보다 앞섰다.
- 선교병원의 위기 : (1) 일제의 식민지적 병원정책에도 불구하고 관립병원은 무료진료환자의 비율에서 선교병원보다 높았고, 의료진과 건물.설비도 우세/ (2) 병원사업이 선교에 기여하는 비중이 감소/ 선교병원의 폐지론이 1910년대 초에 대두.
- 전도에 기여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의료사업은 기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으로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정해짐.
-의료진의 보강과 의료시설의 전문화 추진(병원당 2명의 의사와 1명의 간호사 체제 추진) : 1919년 20명의 의사에서 1922년 36명으로 거의 2배의 의사 보강.
- 의료사업의 확장 : 1918년까지 병원(진료소가 아니라)이 31개까지 확장.
- 종합병원 세브란스를 "미국병원들과 동일한 수준"까지 의료의 질적 수준 향상 추진. 1913년부터 선교기관 연합으로 운영
- 이 시기가 한국의료선교의 황금기였다.
4) 특수 의료 선교사업의 추진
- 나환자 사업 : 1910년 호주 장로교회가 부산진 상애원 사업시작, 남장로회의 광주나병원(1911년 설립), 북장로회의 대구나병원(1915년)
- 농맹아 유아복지사업(1916년부터 시작) : 우량아선발대회, 어머니 반 조직 육아법 교육

5. 시련 속의 선교병원 현상유지정책(1924-1940)
1) 선교부 의료정책-의료선교사의 감축, 한국인 의사들 병원 책임 맡음
2) 세브란스와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 증대-세란스는 1940년까지 910명의 의사를 배출, 당시 한국인 의사가 1,918명이었으므로 전체 의사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의사는 세브란스를 통해 배출되었다.
3) 공중보건교육 사업의 계속:사경회와 학교에서 위생강의, 공중보건 소책자 배포
5) 특수사업 - 나환자, 유아보건 사업 계속/ 결핵사업 개시/ 매년 5만명 결핵으로 사망, 교통.이동성의 증대로 감염율 증대/ 1920년, 세브란스 구내에 최초의 결핵병사 일시 설립
결핵병동, 최초의 병동은 1920년에 세브란스 구내에 잠시 설립되었다가 폐지되었고 두번째 병동은 1924년 평양의 병동이고 세번째 병동은 1928년에 홀 의사가 건립한 해주결핵요양원이고 네번째 병동은 1930년에 건립된 세브란스의 요양원이다. 지속적으로 계속된 것으로는 평양결핵요양원이 사실상 한국최초의 결핵요양원이었다.
- 1932, 크리스마스 씰 발행사업(모금 및 폐결핵 진단 치료 계몽활동)

6. 암흑기(1940-1945):
1940년 160명의 선교사들이 철수, 의료선교사들도 강제추방되었다.

Ⅱ. 한국의 특수 의료선교

1. 특수 의료선교 사업 (1910-1924)
1) 나환자 사업
가: 나환자 사업의 연혁
1871년 한센(Dr. Hansen)씨에 의해 발견되어 한센씨병이라고도 불리는 나병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인도 선교사 베일리(W.C.Bailey) 씨에 의해 1874년 "구라선교회"(Mission to Lepers)가 조직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는 1910년대 전반에 처음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남부지방에 3개의 나병원을 설립하였다. 미국북장로회의 부산(1909년 치료시작, 1910년 정식개원), 미국 남장로회의 광주(1909치료시작, 1911 정식개원), 호주 장로회의 대구(1915년) 등 3곳이었다.
1913년 11월에는 구라회의 회장인 베일리(Bailey)씨가 이미 나환자 치료사업을 하고 있던 부산과 광주 그리고 아직 나환자 치료사업을 하지 않던 대구를 방문하여 나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또한 그들 부부는 총독부 관리를 방문하여 총독부가 나환사사업을 착수할 것을 권하였다.
1917년 현재 한국에는 선교부가 운영하는 나병원이 3곳에 490명(부산 153명, 대구 100명, 광주 237명), 총독부가 운영하는 소록도 수용소에는 100명가량 등, 전체 나환자의 3%에 불과한 590명의 나환자만 정상적인 치료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1921년에는 기독교시설에 수용된 나환자는 550명이었다. 때문에 윌슨 의사는 한국의 모든 선교지부는 나병원을 설립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1년에는 서울에서 "조선나병위원회"(The Leper Comminittee of Chosen)가 조직되어 나환자치료사업의 협의를 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세브란스에서 나병 연구를 위한 나병 교실을 1920년에 설립하고 대구의 플레처 의사를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 호주장로회의 부산진 상애원(相愛園):
원래 미 북장로회는 1904년 어빈(Irvin), 빈튼(Vinton) 두 의사와 스미드(Smith) 목사로 "한국에서의 나환자 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한 바 있었다. 그 후 1909년에 어빈 의사는 부산진 감만동에 나병원을 마련하여 12명을 입원시켰으며 이듬해 1910년 영국구라회(British Leprosy Mission)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처음 30명의 환자를 남녀 병동으로 수용하였다가 1911년에는 환자 수가 40명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에 부산이 호주장로회의 선교구역으로 정해지자 부산의 나환자사업은 1911년부터 호주장로회와 미국 북장로회는 나환자위원회(Leper Comittee)를 구성하여 연합으로 운영하다가 1916년부터 호주장로회의 단독운영으로 변하였다. 1912년에는 나환자위원회(Leper Comittee)의 회장과(스미스, Smith) 서기.회계(윈, Winn)는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맡았고 다른 직무는 호주 장로회가 맡았다. 병원장(Superintendent)는 1912년 4월말까지 잉겔이 맡고 있다가 그 이후에는 역시 호주선교회의 멕켄지가 맡았고 신앙교육은 잉겔이 책임을 졌다. 요양원 안에는 예배를 돕기 위해서 영수(leader)와 집사를 임명하였고 선교사들 뿐 아니라 잉겔의 조사도 그곳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호주장로회의 니벤(Nivenn)은 매주 정기적으로 요양원을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1912년 5월부터 맥켄지(J.M.Mackenzie 梅見施) 목사가 원장이 되면서 상애원(相愛園)으로 불고 이후 상애원은 맥켄지가 계속 책임자로 남아 있었다.
상애원은 1911년 영국의 한 가족의 기부금으로 남성환자를 위한 "게네사렛"집과 그 가족이 설립한 반 페니회(Half Penny League)의 모금운동에 의해 여성을 위한 "리거(League)"의 집을 건립한 후 계속 시설을 확장되었다. 1914년 여성을 위한 "맥래"집(한국선교사로 왔다가 작고한 선교사의 아버지인 맥래(J. F. Macrae)목사가 시무하던 호주교회가 기부)을 신축하고 리거집은 남자환자가 사용하도록 하였다. 1921년에는 뮤레이(Murra)의 집을 시공하였고 1924 년 미감아들을 수용하는 해들리 기념관(The Hadley Memorial Home)이 건립되었다. 1924년에는 벽돌교회 건물이 들어섰다.
상애원은 1914년에 베일리 부처로 부터 1500불을 기부받았으며, 이후 총독부로부터도 한해 2100엔까지 달하는 지원금을 받았다. 1919년에는 호주 본국으로부터 1차대전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기금으로 건물확장비에 사용하였다.
시설확장에 따라 부산진 상애원은 다음 <표 4-4-1>과 같이 거주인원도 점점 많아졌다. 1911년에 40명에서 1938년에는 600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상애원에의 시설은 이처럼 확장되었음에도 많은 나환자들을 다 수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1921년 180명이 살고 있었는데 환자들이 포개어 잘 정도로 인원이 초과한 상태였으나 수용자들은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해 40-50명이 상애원에 들어와 함께 살기를 원하였으나 상애원의 예산의 부족때문에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곳에 받아들여 지지 못하는 나환자 동료를 위해 상애원의 나환자들은 희생정신을 발휘하였다. 즉, 1919년 여름에 4명의 환자들은 자진하여 다른 나환자들이 시설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6개월 동안 상애원을 떠나 구걸을 하고 전도활동을 한 후 돌아왔다. 1920년 여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상애원 밖에서 사는 희생을 감수하기로 지원하였으나 상애원내에 필요한 일손을 확보할 필요성에서 일부만 내어 보냈다. 여름에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 온 12월, 이들의 자리에 있던 나환자들을 내보내는 것도 난처하였는데, 비교적 병이 많이 회복된 환자 17명이 상애원에 새 건물을 지으면 다시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자원하여, 상애원을 떠났다.
다. 미남장로회의 광주나병원
광주나병원은 1909년에 일어난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나환자 사업이 시작되었다. 1909년 4월 목포에서 의료사업을 하고 있던 포사이드(Forsythe) 의사는 오웬(Owen) 의사가 중병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차 광주로 가던 노상에서 나병 말기의 비참한 여성환자가 길가에 서서 "살려주세요" 라고 간청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면서 멈춰서서 선한 사마리아인럼 자기가 타고 있던 말에 그녀를 태워 광주로 데리고 갔다. 포사이드 의사는 그녀를 광주 진료실에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러나 진료실의 다른 환자들의 아우성 때문에 이튿날 윌슨 의사와 상의하여 당분간 그녀를 벽돌 굽던 가마가 있는 곳에 임시로 거처하도록 했고, 남편을 사별한 오웬 의사 부인은 그녀에게 남편이 사용하던 침구를 제공해 주었다.
포사이드 의사와 여러 사람들은 그녀를 각별히 보살피며 전도를 하였다. 비록 그 환자는 얼마 안 있어 죽었지만 그녀의 이러한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그녀는 기독교인이 된 후 임종을 맞이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선교사들의 마음에 비상한 파문을 일으켰고 선교회는 나병환자를 돌 볼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1909년 고천면 봉선리에 윌슨 의료선교사의 주도로 광주선교지부 자체로 기금을 모아서 2개의 방을 마련하여 이후 3년간 7명의 남자 나환자를 수용치료하였다. 그러면서 윌슨 의사는 보다 항구적인 대책을 위해 영국에 있는 인도.동양구라협회(Mission to lepers in India and the East)의 재정지원을 요청하여 2,000불을 받았다. 1911년 선교회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나병환자 수용소의 개원을 승인하여 1912년 광주 수용소가 설립되었다. 이 때 몰려 온 환자의 수효는 45명이었다. 병원건물은 기금을 보내 준 에딘버러 협회를 기념하는 뜻에서 E자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양편에 남녀 숙소가 있었고, 중앙에 진료소와 예배실이 마련되었다. 새로 개발된 대풍자유는 환자들의 치료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13년에는 나병 선교회의 베일리(W.C.Bailey) 부처는 광주를 방문하여 윌슨 의사의 사업에 깊이 감명을 받고 이후 1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할 수 있는 기금을 지원해서 실제적인 첫 수용소 건물이 지어졌다(???1912년과 같은 건물이 아닌지) 이후 계속 여러 곳에서 보내온 기부금으로 병동시설을 확장했다. 나환자 시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중환자로 나누어진 집이 있었고, 블록 타일 등의 작업장과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부속지가 있었다.
1916년에 나병위원회가 조직되어 이후 계속 운영되었다. 윌슨은 의사가 치료와 행정을 담당하과 목사선교사들이 교회와 교육을 분담하였는다. 1921년부터 엉거(J.K.Unger) 목사가 참여하여 장기간 교회일을 감당하였다.
광주나병원은 원래 광주도심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광주시민들이 도심지에 나병원이 있는 것을 항의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1926년 순천과 여수 사이의 율천으로 이전하였고 명칭도 "애양원(愛養院, The Biederwolf Leper Colony)로 개칭하였다. 나병원을 순천으로 이전하는 전후하여 거주인원이 600명을 초과하였다. 13년간 광주나병원은 1149명의 환자를 수용했으며, 그 중에서 238명이 사망했고, 230명이 퇴원했다.

매월 환자 1인당, 음식, 의복, 치료 5불 가량이 필요하였으나 나환자들은 자활노동을 하였으므로 에 필요한 매환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2불(4엔) 밖에 들지 않았다.

광주나병원에 관한 소식이 알려 지자 도처에서 나병원에서 제공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나환자들이 몰려들었다. 환자들 중에는 선교사의 소개로 광주를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실제로는 나병원서 수용할 수 있는 이상으로 환자들이 몰렸다 그래서 후원자를 지속적으로 모집하였으나 때로는 후원자들의 후원할 것을 기대하고 환자들을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광주 나병원에서도 나병원에 살게 되는 행운을 가진 환자들은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였다. 즉 광주나병원에 사는 나환자 6명이 함께 동의하면 바깥에 있는 나환자 한 명을 입양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두었던 것이다. 아마, 6명의 나환자가 자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여 한 명의 나환자를 후원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 같다.
라. 미북장로회의 대구나병원
1915년 6월 플레쳐(A.G.Fletchre) 의사가 6명의 나환자를 작은 초가집에 수용하여 숙식을 제공하면서 대구 나환자사업이 시작되었다. 1915-1917년 3년동안은 임시 막사에서 12명을 치료해 왔다. 두번째 나환자 수용소인 대구나병원(Taiku Leper Hospital)은 1914년 나병선교회 베일리(Bailey) 부처 방문시 희사한 5,000불의 지원을 받아 191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7년 9월에 병원을 완성하고 10월에 각 50명의 남녀 환자를 받았다. 1만 8천여 평의 부지, 1,500평의 대지 위에 2층 벽돌 건물의 병원은 달성군 달서면(현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 위치했다. 1924년에는 거주하는 나환자의 3분의 1은 20세 미만이었고 어린이들도 있었다.
1923년에 일본 총독부와 일본 천황이 기부금을 내었고 서울의 총독부병원도 대풍자유 100인분을 기부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 환자로부터의 치료비를 비롯한 한국인 자신의 재정으로 한옥식의 작은 병동을 계속 세워 매년 더욱 많은 환자를 수용하였다. 1922년에는 어린이 병동을 따로 마련키로 했다. 1924년까지 7년동안 한국인 자신들의 기금에 의해 9개의 작은 병동을 짓고 수용가능인원도 200명으로 증가하였다. 대구나병원의 거주인원은 다음 <표 4-4-3>과 같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건물을 완공한 후에 거주인원이 350명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는 106명(남자 70명, 여자 36명)이 병원으로 들어왔는데 이들 중 72명(남자 49명, 여자 23명)은 완쾌되어 퇴원하였고 12명은 병사하였다.

2) 결핵사업과 농.맹아 사업
가. 폐결핵 사업
폐결핵은 중요한 전염병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사업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다만 1920년 3월 독립운동으로 수람되었다가 결핵에 걸려 출옥한 배동섭을 진료하기 위해 세브란스 구내에 최초로 결핵병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내과 교수인 스타이스 의사의 주선으로 6백원이나 들여서 설립하였지만, 배동섭의 사망후 세브란스 직원들의 주택으로 학생들의 휴식실로 용도전환되어 1929년에도 휴식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결핵퇴치사업에 대한 필요성을 선교사들에 의해 자주 제기되었다. 윌슨의사는 1912년부터 결핵요양원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는 결핵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는 정도였고 결핵요양원의 건립은 다음 시기에 이루어 졌다. 1922년 {신학세계}에서 채성석은 페결핵의 방지와 치료법에 대한 글을 발표하여 계몽하였다. 이 글에서는 폐결핵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요청하였다. 또 영국과 이태리에서 양조업자와 음주자들에게 폐결핵이 많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술을 절대 금하도록 요청하였다. 술은 결핵균에 대한 저항력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몸을 건강케 하는 데 필요한 음식을 살 돈을 탕진해 버린다는 것이다. 의학적 주장이 절제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점은 흥미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나. 농.맹아 사업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는 서울과 동경에서 맹인 및 농아학교를 운영해 오다가(몇년 부터???) 1913년에 평양에도 농아 및 맹아학교가 문을 열었다. 평양에서는 1899년부터 홀 여의사가 맹인교육사업을 시작한 학교가 정식 맹아학교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1913년에는 적자가 150불이나 되어 1914년에는 무료입학생을 받지 못하고 학비를 낼수 있거나 후원자를 가진 학생 4명만 입학을 허용하였다. 이후에도 모자라는 재정은 선교사와 기독교인, 일본인 등 개인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충당하였다. 1914년에 선교부에서 경영하던 평양, 서울, 그리고 일본의 맹인 및 농아학교의 등록생은 14명이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동경맹아학교 학생 2 명중 한 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1914년의 재정지원 호소에 대해 미북감리회, 미남감리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등에 소속된 선교사들, 연합교회, 주일학교연합회, 그리고 일본인 개인들이 운영비를 후원하였다.
1914년 여름에는 평양에서 한국,중국, 일본 3국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들이 맹인 및 농아교육에 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일본에서는 나까무라가 맹인회장이 일어판 보고서를, 그리고 지부(之不*)농아여학교의 카스테스(Castes)양이 영어판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행사에 대해 주한 일본인관리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박애정신을 홍보하려 하였다. 테라우치 총독은 회의에 축하전문을 보냈고 문교부장관 세키야는 직접참석하였다. 또한 무추나가 도지사의 환영사와 서울프레스의 야마가타 편집장의 환영사는 외신을 타고 국제적으로 널리 보도 되었다. 야마가타는 환영사를 통해 유럽에서의 전쟁상황을 상기시키면서 극동에서는 평화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부각하였다.

2. 농아.맹인사업 (1924-1940)
1) 평양의 농아사업
맹인을 위한 한국기독교의 사업은 로제타 셔우드 홀 여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1894년 맹인사업을 1909년에 농아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21년에는 10명의 농농아를 농아학교에서 교육하였다. 1914년에 서양의 대표와 함께 중국, 만주, 일본, 한국의 대표들이 모인 제1차 극동 맹아 농아 교육자 대회(the first Convention of Educatorsof the Blind and Deaf in the Far East)가 평양의 포에니곶에서 개최되었는데, 홀 여의사도 초대되어 참석하였다. 한편 북장로회의 모펫부인(Mrs. Alice Fish Moffet)이 평양1904년에 시작한 맹인학교가 수년간 운영되다가 1934년 다시 확장되었다. 이 맹인학교는 1937년경에는 이미 맹인 뿐 아니라 농아까지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이 학교는 당시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유일한 맹인농아학교였다. 장애인을 위한 이 학교는 교실과 기숙사를 신축하기 위해 부지를 샀으나 건축기금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평양지역의 교회들이 재정의 일부를 담당하기로 하였고 학교운영비는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책임지겠다고 하였으나 건축비를 위해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역시 평양에서 북감리회도 헤인 여목사(Miss. E. I. Haynes)가 맹인학교를 운영하였다. 헤인 목사는 1931년에 목사안수를 받아 1937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2) 서울의 맹인사업
서울의 기독교 맹인사업은 전도활동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블레어 여사는 한국인 여성 한명을 고용하여 맹인에게 기독교복음전도를 하던 중 1929년 맹인들의 생활대책을 마련하고 그들에게 전도를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맹인직업훈련학교를 세우는 일로 생각하여 학교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총독부는 이미 맹인을 위해 직업훈련학교를 세워 바느질, 뜨개질, 맛사지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블레어 여사가 구상한 맹인학교도 점자도 가르치고 직업훈련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사를 물색하면서 전도인에게 매월 지불하는 15달러 외에 1년예산 500달러를 모금하였다. 블레어 여사가 추진한 맹인학교는 이후에 선교회 관련자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도활동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학교건립사업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본격적인 맹인전도와 예배, 그리고 점자교육은 1931년에 시작되었다. 맹인 고아로서 피어슨성경학교(Pierson Memmorial Bible Institute)와 일제의 관립맹아학교를 졸업한 오형상씨가 1931년 3월 코엔 선교사에게 맹인선교사업을 제안하여 맹인선교회를 조직, 5월 1일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중앙장로교회(승동교회)가 무료로 빌려 준 예배당에서 매주일 오전 10시에서 11시까지 오형상 전도사의 인도하에 매일 성경반으로 모였다. 첫날부터 20명이 참석하였고 그후 많을 때에는 30명이 참석하였다. 오전 10시의 모임은 1941년까지는 계속 모인 것이 확인된다. 1934년에는 주일모임은 10시에서 12시까지 연장하여 모였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구용산과 신용산에서 각각 모임을 가졌다.
오형상 전도사의 맹인사업의 후원자는 1934년에 10여명이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간 교회당 공간만 빌려주던 승동교회가 1930년대 중반부터(1940년의 자료에서 "many years ago"라고 기록되어 있음) 매월 둘째 주일에 맹인들을 위해 헌금을 하여 기금을 모았다. 또한 1940년에 한국인들로 맹인선교회를 구성하였고 서울시내의 모든 교회에 편지를 보내 맹인전도사업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점차 확산되어 갔다. 맹인성경공부반에는 1934년에 40명이 등록되어 평균 20명이 출석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맹인들은 국립맹인학교 등에서 학업 중에 있었고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졸업 후에는 서울을 떠남에 따라 성경공부반 참석자는 계속 교체되었다. 그래서 32-33년, 3년 동안 충실하게 성경공부반에 참석한 맹인들은 실제로는 100명가량되었다.
한편 승동교회의 맹인성경공부반은 1932년에 서울국립맹인학교의 기독교인 한국인 교사 한 명의 호의로 점자성경을 제작하는 계획을 세워 1933년 가을에 점자기계로 찍은 마태복음 점자를 완성하여 성경공부애 사용하였다. 1935년에 누가복음도 성경공부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인쇄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찬송가는 점자인쇄기로 인쇄되지는 않았으나 두 명의 소년이 찬송가를 배워 손작업으로 점자찬송가를 만들었다.
1934년경에도 조금만 많아지면 여성맹인 전도사업을 희망하였으나 여성맹인 전도사 고용하는 것은 1937년까지도 실천하지 못하였다. 맹인사업은 1941년 등록인원은 40명으로 변동이 없었지만 참석자는 30명으로 늘었다. 이해 기준으로 20명이 교회의 정회원(full church member)로 되었다. 이들은 중 20명 이상이 항상 승동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해에는 코엔 목사가 안식년 기간이라서 그런지 주일 예배 외에는 매월 1회 금요일에 구역예배 모인 것만 기록되어 있다.
한편 크리스마트 파티는 1931년과 1936년의 것이지만 크미스마스 파티는 승동교회에서 매년 한 듯하다. 1931년 12월 26일에는 크리스마스 축하행사를 하였다. 1936년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승동교회의 목사와 직원, 교인들의 축하속에 맹인 여성 한명을 포함하여 33명의 맹인이 참석하였다. 그 중 비기독교인 6명은 모두 승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하였다. 감동적인 것은 참석자들은 강도를 만나 입원한 비기독교인 맹인 한명을 위해 입원비의 일부인 15엔을 헌금하였다.
코엔과 오형상 전도사의 맹인사업은 경제개선 등의 일반적인 복지가 아니가 전도에 1차적인 목표가 있었다.

"우리의 당장의 목표는 영적인 것이었다. 즉 이 도시(서울시를 말함 : 인용자 주)의 모든 맹인의 복음화, 그리고 복음전도에 반응할 사람들에 대한 종교교육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맹인들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적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는 맹인 신자들은 두명씩 손을 잡고 다니면서 서로의 안내자가 되는 등 서로 돕는 법에서 성장이 있었다. 1931년 가을에 오경상 전도사는 장피푸스에 걸려 죽어가는 한 맹인 소년을 발견하여 관립병원에 입원시켜 병을 치료하게 하고 퇴원때에는 맹인들이 돈을 모아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 자신들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면면서도 헌신적으로 사랑을 나눈 이들 맹인들은 새로운 영적 도덕적 시야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Ⅲ. 한국 선교의 방향성의 문제

현재 한국에서는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의 수가 많은 그만큼 문제도 많이 제기되고 주재국들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우리는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 주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에 대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드러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한국의 해외선교를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 것인가. 여러가지 제안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의료 교육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해외 선교도 다양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지인들이 신경쓰지 못하는 분야를 찾아 섬기는, 장애인 선교가 필수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가령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나면서부터 귀먹고 보지 못하던 이들을 위한 특수 선교는 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고 그들의 천부적인 인권을 도로 찾아주는 귀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 선교는 현지에 가서 돈과 물품을 뿌리고 자파의 세력을 부식하기 위한 신학교 세우기에만 골몰하는 선교를 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신경쓰지 못하는 그늘진 곳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과거 우리 나라에 장애인 선교를 비롯한 특수선교를 통해 선교의 고상한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한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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