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자료

초기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와 그 역사적 의의

페이지정보

작성자 관리자 날짜03-08-19

본문

제 2회 선교정책세미나

발제 2.  초기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와 그 역사적 의의
정형석 목사(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 상임이사, 강남구가정복지센터 관장)

Ⅰ. 서언
최근 장애인 선교가 한국 교회의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영향력이 있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장애인 선교를 위한 부서를 조직하고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교단적으로도 장애인 선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 선교기관의 수도 계속 증가하여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선교단체총연합회에 가입한 단체만도 무려 100여 개나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선교초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장애인 선교를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여 장애인을 위한 여러 가지 선교활동을 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의 장애인 선교현황을 고찰해 보고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봄으로 장애인 선교에 대한 유익을 얻고자 한다.

Ⅱ. 초기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 현황

1. 맹인 선교
맹인선교는 평양에서 부인병원과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를 설립한 감리교 선교사인 로제타 홀(R. S. Hall) 여사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녀는 1894년 평양에서 기독교신자의 딸인 오봉례라는 맹인 소녀를 만나 점자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근대 특수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홀 여사는 자신이 고안한 뉴욕식 한글점자(평양점자, 조선훈맹점자)로 조선어 기도서, 십계명 등을 직접 점역했다. 1900년부터는 맹교육을 학교교육의 일환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녀가 가르쳐온 4명의 맹아동들을 평양의 정진여학교에 입학시켜 통합교육을 시도했다. 맹여아에게 점자지도와 뜨개질 등 직업교육을 별도로 실시하는 한편 일반 정규 교과목은 일반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1905년 맹학생은 모두 7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에게 점자지도 이외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경공부, 지리, 음악, 기술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교육받은 맹학생들은 그들 가족들에게 전도하여 가족들도 기독교 교인이 되게 했다. 또한 입원환자들을 돕는 일도 했다.

그 후 1903년 평양여자맹인학교가 평양 기홀병원 내에 정식으로 설립되어 교장에 홀 여사가 취임하였으나 1907년 미국 선교사 포르가 창립한 평양맹아학교와 합병하였다. 1904년에는 평양남자맹인학교가 창립되어 교장에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취임하였으나 1914년 이 두 남녀 맹인학교는 평양맹인학교로 합병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맹인학교는 당시에 복술을 주로 하고 있었던 맹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고 복술에서 침구나 안마 등으로 직업을 전환하도록 교육을 했다.

또한 미국 선교사 코헨 목사는 맹인들만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힐 선교사가 청주에 청주맹학교를 설립하였고 의사인 루 선교사 부처는 대전에 천광원이라는 맹인직업센터를 세웠다.

한국인에 의한 선교활동도 있었다. 1910년 맹인 전도사 백사겸의 선교활동이 있었으며, 1926년 맹인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려지는 박두성 집사가 훈맹정음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글점자를 창안하여 1941년 성서공회에서 점자성경이 출판되었다. 1926년 승동교회 안에 맹인전도반이 만들어져 활동했으나 오래 전에 없어졌다.

1935년 이창호 목사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맹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평양광명맹아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평양맹아학교를 평양노회 도제직회가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전인선 목사가 기독교대전선교단 내에 라이트 하우스(Light House)를 설립하여 가난한 맹아들을 수용하여 복음전도와 점자출판물로 교양교육 등을 1956년까지 실시하였으며, 같은 해 이영식 목사는 대구에서 대구동아맹학교를 창설하였다.

1966년 외원단체로 등록된 미국의 초교파 선교단체인 연합세계선교회(United World Mission)에서는 1971년부터 박대의 선교사(Barrie. G. Flitcroft)가 한국인과 더불어 맹인선교사업으로 점자번역과 출판사업, 맹인 장학사업을 하다가 1991년 성결교 유지재단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시각장애인재활원으로 독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2. 농아인선교
농아인선교사업은 1909년 선교사들에 의하여 평양농아학교가 세워지면서 농아인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맹아학교 안에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맹아교육과 농아교육의 특수성이 인정되어 분리되기 시작했다. 농아인선교는 장애 특성상 맹인선교에 비하여 뒤떨어져 있다.

농아인사업은 1935년 평양노회 도제직회가 운영한 평양맹아학교 내에서 농아인을 위한 주일예배가 있었는데 이것이 농아교회의 효시이다. 그 후 구화교육의 개척자로 최병문 장로가 나타나 마포구화학교를 세웠다. 1945년 영락교회에서 시작된 농아부 예배가 남한에서 시작된 농아인교회의 효시이다.

1960년 하나님성회 소속 선교사인 베티헨리 여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최성만 목사와 함께 부산에바다 농아교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국제특수선교회(World Opportunites International) 소속인 호주의 네빌뮤어(Neville Muir) 선교사는 1978년 한국에 들어와 1979년 인천임마누엘 농아교회를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10여 개의 농아인교회를 개척하였고 농아인들의 자활을 위해 농아인자활봉재소와 에바다목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3. 지체장애인 선교
지체장애인 선교는 1897년에 페리(Jean Perry)양이 9명의 선교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불구아동을 위한 집을 서울에 세웠다. 1901년에는 23명의 장애아동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아가 19명이었다. 여기서는 한글과 한문, 창가, 산술, 지리, 재봉, 기타 기초지식들을 가르쳤다.

1959년 캐나다 연합교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온 구애련 선교사(Marrion E.Current)는 물리치료사로 연세대학과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장애인복지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1959년 북장로교 선교사인 아담부인이 연세의료원에 소아재활원을 개설하여 지체장애아동을 위한 사업을 구애련 선교사와 함께 시작하기도 했다.

4. 기타 선교사업
모페트(S. A. Moffett)부인은 한국 교회가 구성한 이사회와 함께 장애인들을 깨우치고 장애요인들을 극복시켜주기 위해 그들을 교화하는 작업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나환자를 위한 복지사업이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나환자 사업을 하였던 윌슨의 말처럼 당시에 가난은 비참했지만 여기에 나병이 겹치면 이보다 더한 비극은 없었다. 1897년에는 각국의 구라회 후원으로 부산나병원이 개설되었고, 1913년에는 나환자를 위한 병원인 대구 애락원이 설립되어 후렛차 박사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04년 한국연합선교회는 나환자 구호를 위해 어빈(Irvin), 빈톤(Vinton), 스미스(Smith) 목사 등을 나환자사업 위원으로 선정하여 조사를 해, 1909년에는 윌슨(Wilson)과 포자이드(H. W. Foreythe)에 의하여 구라복지사업이 광주에서 시작되었으며, 1925년에는 여수로 옮겨 애양원으로 확장되었다. 특이한 일은 1918년 장로교 7차 총회에서 나환자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으며 이 영향으로 1916년 소록도에 오늘의 국립나병원이 설립되었다.

또한 6·25 전쟁이후 생겨난 외원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기독교아동복지회, 세계기독교선명회, 한국십자군연맹 등에서도 부분적이지만 장애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을 실시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Ⅲ. 선교사의 장애인 선교의 역사적 의의
이처럼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미래지향적인 선교로 장애인 선교에 대한 좋은 전통을 세워주었다.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애인 선교를 선교초기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삼아 일반인 선교보다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러한 선교정책은 성경적인 선교정책으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선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현재 우리 한국 교회의 국내선교와 해외선교에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프로그램을 통한 선교, 즉 전문적 선교, 전인적 재활을 추구함으로 장애인 선교의 효과성을 극대화시켰다. 현재 우리 나라의 장애인 선교가 복지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재정적인 자원의 한계로 전문적인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셋째, 장애인을 위한 국가의 특수교육과 복지사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정부의 장애인복지사업을 이끌어 주었다. 또한 고아와 양로사업을 비롯하여 결핵환자를 위한 치료사업 등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의 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금도 80% 이상의 사회복지시설들이 기독교인에 의하여 운영되는 등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의 사회사업에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다.

넷째, 사회적 통합을 촉진시켰다. 홀 여사의 경우에는 지금도 쉽지 않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통합교육을 실시하였다.

다섯째,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선교사들의 장애인복지사업에 있어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당시의 한국의 시대적 배경이 유교적,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남자 선교사들이 여성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점도 있었지만, 지금도 특수교육이나 사회사업 그리고 장애인 선교현장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아마도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하여 기질적으로 모성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참여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여섯째, 선교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것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사회복지시설들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되면서 설립 때의 기본정신인 선교적 이념이 약화된 것과 특수선교기관으로 장애인 선교회를 한국인에 의하여 조직하지 못하므로 지금 한국에 선교사들이 조직한 장애인 선교기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초기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현황과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이제 장애인 선교를 가장 성경적이고 효과적인 선교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장애인 선교는 교회의 하나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선택적 사역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역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랑과 정의와 고난의 종교이기 때문에 장애인 선교는 가장 복음적인 선교활동인 것이다.

선교학자들은 선교를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제1단계는 각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단계이고, 제2단계는 파송된 선교사들이 각 국의 내지에 까지 선교하는 단계이며, 제3단계는 내지까지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각계각층의 복음의 소외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계이다. 현재 세계선교는 제3의 단계에 와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해외선교에 있어서도 장애인 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는 초기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좋은 전통을 살려 장애인 선교가 한국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계 교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외 선교지에서도 장애인 선교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게시물 검색